표절에 해당하는지 궁금합니다.

61.34.109.205 2017-09-03 12:21:00

실학자 유득공의 문서를 열람하던 중 이상한 부분이 있어 검토해봤더니 네이버캐스트에 정성희 씨라는 분이 쓴 유득공 문서를 완전히 베껴왔습니다. 본문에도, 수정 코멘트에도 출처 표시 없습니다.

네이버캐스트에서는 출처를 저자 정성희 씨로 명시하고 있고 여기에,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외부 저작권자가 제공한 콘텐츠는 네이버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출처만 밝히고 기재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싹 지워야 하는 건지, 혹은 현상 유지해도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https://namu.wiki/w/%EC%9C%A0%EB%93%9D%EA%B3%B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939&cid=59015&categoryId=59015


완전히 베껴왔다는 말은 말 그대로 완전히입니다. 약간 고치거나 문장을 이은 곳도 몇 곳 있습니다. 혹시 몰라서 교차 검증 둡니다.


1. 
네이버캐스트: “내 친구 유혜풍(유득공)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십일도회고시주]를 지어 우리나라의 볼 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발해고]를 지어 발해의 인물, 군현, 왕의 계보, 연혁을 자세히 엮어 종합해 놓았으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한 것이다.”

나무위키: “내 친구 유혜풍(유득공)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십일도회고시주]를 지어 우리나라의 볼 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발해고]를 지어 발해의 인물, 군현, 왕의 계보, 연혁을 자세히 엮어 종합해 놓았으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한 것이다.”


2.
네이버캐스트: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 외에 발해를 포함한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 [발해고] 서문 중에서

나무위키: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 외에 발해를 포함한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 「발해고」 서문 中


3.
네이버캐스트: 정조가 발탁한 네 명의 규장각 초대 검서관(奎章閣初代檢書官) 중의 한 사람이다. 

나무위키: 정조가 발탁한 최초의 규장각 검서관 4인[1] 중 한 명. 


4.
네이버캐스트: 자는 혜풍(惠風)ㆍ혜보(惠甫), 호는 영재(冷齋)ㆍ영암(冷菴)ㆍ가상루(歌商樓)ㆍ고운당(古芸堂)ㆍ고운거사(古芸居士)ㆍ은휘당(恩暉堂) 등 다양하다. 

나무위키: 자는 혜풍(惠風)ㆍ혜보(惠甫), 호는 영재(冷齋)ㆍ영암(冷菴)ㆍ가상루(歌商樓)ㆍ고운당(古芸堂)ㆍ고운거사(古芸居士)ㆍ은휘당(恩暉堂) 등 다양하다. 


5.
위키백과:북학파의 거장 박지원의 제자로 이덕무 등과 더불어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산업 진흥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제가·이덕무·이서구(李書九)와 함께 한학 4가(漢學四家)라고도 불리었다.

나무위키:북학파의 거장 박지원의 제자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산업 진흥을 주장하였다. 문체에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한문 신파 사가(漢文新派四家)로 일컬어진다.


6.
네이버캐스트: 1748년 음력 11월 5일 부친인 유춘과 모친인 남양 홍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유득공은 증조부 유삼익과 외조부 홍이석이 서자 출신이었던 탓에 신분상 서자로 살아야 했다.

나무위키: 1748년 음력 11월 5일 부친인 유춘과 모친인 남양 홍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유득공은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 출신이었던 탓에 신분상 서자로 살아야 했다. 


7.
네이버캐스트: 유득공의 생애는 자세하지 않다. 일생을 기록해 놓은 행장이 아쉽게도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위키: 유득공의 생애는 불행하게도 일생을 기록해 놓은 행장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하지 않다. 


8.
네이버캐스트: 편적이나마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부친이 사망했다고 한다. 

나무위키: 다만 그의 나이 5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어, 


9.
네이버캐스트: 친정이 무반 집안이라 글공부를 할 분위기가 아니자, (중략)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아들의 학업을 이어갔다.

나무위키: 그런데 외가가 무신 집안이라 도저히 글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삯바느질로 그의 공부를 뒷바라지한다. 



10.
네이버캐스트: 어린 시절부터 유득공의 학문적 성장에 영향을 준 인물은 숙부 유련(柳璉, 1741~1788, 훗날 柳琴으로 개명함)이었다. 
나무위키: 어린 시절부터 유득공의 학문적 성장에 영향을 준 인물은 숙부 유련[* 1741~1788, 훗날 유금(柳琴)으로 개명함]이었다. 


11.
네이버캐스트: 유련은 유득공의 부친인 유춘의 둘째 동생으로 ‘기하(幾何)’를 호로 사용할 정도로 수학과 천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1776년(정조 즉위년) 서호수의 막관으로 중국을 여행한 북학파 출신의 실학자였다. 20세를 전후로 하여 유득공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여 숙부인 유련을 비롯하여 홍대용ㆍ박지원ㆍ이덕무ㆍ박제가ㆍ이서구ㆍ원중거ㆍ백동수ㆍ성대중ㆍ윤가기 등과 교류하였다. 이들은 단순한 교류에서 그치지 않고 ‘백탑동인(白塔同人)’이라는 시동인회(詩同人會)를 결성하기도 했다.

나무위키: 유련은 유득공의 부친인 유춘의 둘째 동생으로 ‘기하(幾何)’를 호로 사용할 정도로 수학과 천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1776년(정조 즉위년) 서호수의 막관으로 중국을 여행한 북학파 출신의 실학자였다. 20세를 전후로 하여 유득공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여 숙부인 유련을 비롯하여 홍대용ㆍ박지원ㆍ이덕무ㆍ박제가ㆍ이서구ㆍ원중거ㆍ백동수ㆍ성대중ㆍ윤가기 등과 교류하였다. 이들은 단순한 교류에서 그치지 않고 ‘백탑동인(白塔同人)’이라는 시동인회(詩同人會)를 결성하기도 했다.


12.
네이버캐스트: 유득공은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25세 때 기자(箕子)로부터 후백제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나라 한시를 모은 [동시맹(東詩萌)]을 엮으면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서사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773년에는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과 평양을 유람하고 이어서 백제의 도읍지인 공주를 다녀오면서 역사지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훗날 유명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이때의 기행이 토대가 된 것이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이십일도회고시]는 위만조선의 멸망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연구하며 도읍지의 변천에 주목, 그에 따른 사실들을 시문으로 지은 것이다.

나무위키: 유득공은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25세 때 기자(箕子)때 부터 후백제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나라 한시를 모은 동시맹(東詩萌)을 엮으면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서사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773년에는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과 평양을 유람하고 이어서 백제의 도읍지인 공주를 다녀오면서 역사지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훗날 유명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이때의 기행이 토대가 된 것이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이십일도회고시는 위만조선의 멸망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연구하며 도읍지의 변천에 주목, 그에 따른 사실들을 시문으로 지은 것이다.


13.
네이버캐스트: 사실 유득공은 역사가라기 보다는 시인에 가까웠다. 백탑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유득공은 다른 백탑파 출신의 실학자들처럼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들을 섭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런 가운데 점차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득공은 중국을 비롯하여 만주, 몽고, 이슬람, 베트남, 미얀마, 대만, 유구 등 다른 나라들로 관심 영역을 넓혀갔고, 이는 자연스럽게 세계관의 확장을 가져와 종래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나무위키: 사실 유득공은 역사가보다는 시인에 가까웠다. 백탑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유득공은 다른 백탑파 출신의 실학자들처럼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들을 섭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런 가운데 점차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득공은 중국을 비롯하여 만주, 몽고, 이슬람, 베트남, 미얀마, 대만, 유구 등 다른 나라들로 관심 영역을 넓혀갔고, 이는 자연스럽게 세계관의 확장을 가져와 종래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4.
네이버캐스트: 한백겸의 동국지리지[3]의 영향을 받아 북방사에 관심을 두어 만주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은 세태와 발해 이후 옛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지 못했음을 한탄하였다.

나무위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의 영향을 받아 한강 이남의 역사에 주목했던 유득공은 점차 한강 이북의 북방사(北方史)로 관심을 돌렸다. 그가 북방 역사에 주목하게 된 것은 더 이상 만주 지역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발해고] 서문에서 유득공은 우리 역사의 무대였던 만주를 잃어버린 것을 통탄하였다.


15.
네이버캐스트: 유득공은 1774년 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나무위키: 유득공은 1774년 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6.
네이버캐스트: 소과 시험에 합격하여 생원은 되었지만, 대과 시험인 문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 시기 유득공은 암울하고 답답한 자신의 처지를 시에 담아 달래 보기도 했다. 이때 지은 100편의 시가 그의 문집인 [가상루집(歌商樓集)]에 수록되었다. 

나무위키: 소과 시험에 합격하여 생원은 되었지만, 대과 시험인 문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 때 대과에 떨어진 울적한 마음에 지은 100편의 시가 그의 문집인 '가상루집(歌商樓集)'에 수록되었다. 


17.
네이버캐스트: 그가 관로에 나간 것은 1779년, 32세가 되던 해였다. 마침내 이덕무ㆍ박제가ㆍ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초대 검서관에 등용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역사지리라는 학문에만 전념하여 가난이라는 시련을 맞아야 했던 유득공은 검서관이 되어 어느 정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규장각 일 외에도 35세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머물면서 서적들을 조사하는 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나무위키: 그가 관로에 나간 것은 1779년이었다. 정조에 의해 초대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가난을 견뎌야 했던 유득공은 검서관이 되어 어느 정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규장각 일 외에도 35세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머물면서 서적들을 조사하는 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18.
네이버캐스트: 15년에 이르는 검서관 생활 외에도 지방관을 역임한 것 또한 그의 중요한 이력 중의 하나이다. 37세 때인 1784년에 포천현감을 시작으로 지방관 생활을 하였는데, [발해고(渤海考)]는 이 무렵에 저술된 것이다. 규장각에서의 연구 활동이 [발해고]를 서술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듬해에는 양근(지금의 양평)군수로 옮겼다가 42세 때인 1789년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광흥창 주부로 있었고, 다시 이듬해 5월에는 사도시 주부로 자리를 옮겼다.
지방관으로서 유득공은 “나랏일을 하는데 나라법인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양반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토대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일처리를 하였다.

나무위키: 그는 15년의 규장각 검서관 활동 이외에도 지방관을 역임한 적이 있다. 1784년에 포천현감을 시작으로 지방관 생활을 하였는데, 발해고(渤海考)는 이 무렵에 저술된 것이다. 규장각에서의 연구 활동이 발해고를 저술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듬해에는 양근(지금의 양평군)군수로 옮겼다가 42세 때인 1789년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광흥창 주부로 있었고, 다시 이듬해 5월에는 사도시 주부로 자리를 옮겼다. 지방관으로서 유득공은 “나랏일을 하는데 나라법인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양반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토대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일처리를 하였다. 


19.
네이버캐스트:  풍천부사로 부임하던 무렵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유득공은 1801년(순조 원년)에 풍천부사에서 물러난 뒤 칩거하며 저술에만 몰두했다. 60세를 일기로 1807년 9월 1일에 세상을 떠나 성해응이 은거하던 포천 향산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양주(楊州) 송산(지금의 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장남 본학(本學)과 차남 본예(本藝) 등 2남 2녀를 두었으며, 두 아들 모두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했다.

나무위키: 풍천부사로 부임하던 무렵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유득공은 1801년(순조 원년)에 풍천부사에서 물러난 뒤 칩거하며 저술에만 몰두했다. 1807년 9월 1일에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양주(楊州) 송산(지금의 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장남 본학(本學)과 차남 본예(本藝) 등 2남 2녀를 두었으며, 두 아들 모두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했다.